Review
크루세이더 킹즈 3 후기

크루세이더 킹즈 3는 내 스팀 게임 중에서 플레이 시간 1위다. 원래 Xbox 게임패스로 처음 접했는데, 하다보니 너무 재밌어서 결국 스팀 버전을 샀다. 게임패스 버전은 업데이트가 안 되고 있었고, DLC까지 해보고 싶어서 스팀으로 다시 사게 됐다. 그만큼 처음할 때부터 신선하고 재밌게 느껴졌던 게임이다.

처음 시작하면 화면에 버튼과 읽어야 할 글이 너무 많아서 당황스럽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튜토리얼을 해도 여전히 어렵다. 이런 대전략 게임을 처음 해본다면 진입장벽이 꽤 높게 느껴질 것 같다.
그런데 익숙해지고 나면 오히려 기능이 적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장르의 게임 중에서는 그나마 진입장벽이 낮은 편인 것 같다. 하츠 오브 아이언이나 빅토리아 시리즈에 비하면 훨씬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크루세이더 킹즈 3는 가문을 운영하고 키워가는 게임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인물의 1인칭 시점에 가깝다. 왕조를 이어가는 것이 목표이긴 하지만, 결국 내가 플레이하는 건 그 순간의 한 인물이다. 이 느낌이 코에이의 삼국지 13이나 삼국지 8 리메이크 같은 장수제 시스템과 비슷했다.
이 게임을 표현하는 말 중에 '중세 심즈'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잘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심즈에서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걸 이 게임은 텍스트로 표현할 뿐이다. 중세 유럽이나 아시아 속 인물이 되어 살아볼 수 있다.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고, 정치를 하고, 전쟁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플레이 방식에 따라서 다양한 이야기가 생기고, 각각의 선택이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플레이 인물에 몰입하는 것이다. 크루세이더 킹즈는 하츠 오브 아이언이나 빅토리아 시리즈와 비교했을 때 전략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지능적이고 효율적인 플레이 대신, 그 인물에 이입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예를 들면 바람둥이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면, 연애가 비효율적인 상황에도 그 롤플레잉을 해야 한다. 탐욕스러운 인물이라면 금전적 이득을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하고, 용감한 인물이라면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
스트레스와 성격 트레잇 시스템이 이런 플레이를 자연스럽게 유도해준다. 성격에 맞는 행동을 하면 스트레스가 낮아지고,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스트레스가 높아진다. 스트레스가 너무 높으면 정신병에 걸리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게임 시스템이 롤플레잉을 강제하는 셈이다.

이런 방식 덕분에 매 플레이마다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떤 캐릭터로 시작하느냐,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탈리아의 작은 백작으로 시작해서 이탈리아 왕국을 세울 수도 있고, 아일랜드의 부족장으로 시작해서 잉글랜드를 정복할 수도 있다. 몽골 칸으로 유라시아를 정복할 수도 있고, 인도의 라자로 힌두 제국을 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제시되는 선택지는 반복된다. 처음에는 신선했던 이벤트들이 여러 번 보다 보면 익숙해진다. 어떤 선택을 해야 유리한지 알게 되고, 그 선택지가 플레이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순간 몰입이 깨지고, 그 회차를 끝내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또다시 다른 컨셉을 가지고 새로운 플레이를 시작하게 된다. 이번에는 바이킹으로 해볼까, 이번에는 이슬람 국가로 해볼까, 이번에는 유목민으로 해볼까. 새로운 문화권, 새로운 종교, 새로운 정부 형태는 또 다른 경험을 준다.
최근에는 DLC로 몽골 지역의 시스템과 동아시아가 추가되면서 컨텐츠가 좀 더 풍부해졌다. 동아시아 문화권을 플레이할 수 있게 되고, 몽골 유목민 정부의 특수한 메커니즘도 생겼다. 다만 너무 다양한 모디파이어가 생기면서 돈과 군사력 밸런스가 좀 깨진 것 같다. 특정 빌드를 사용하면 너무 쉽게 강해질 수 있다. 이것도 컨셉 플레이를 방해하는 요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인물의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컨텐츠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연애 시스템이나 경쟁자, 천적 시스템이 강화되면 좋을 것 같다. 단순히 능력치와 관계도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 더 구체적이고 드라마틱한 관계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3는 내가 가장 오래 플레이한 게임답게 정말 재밌는 게임이다. 다른 게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중세 시대의 한 인물이 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경험은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다만 이 게임을 재밌게 하려면 스스로 몰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효율만 따지면서 한다면 금방 지루해질 것 같다. 그 인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 인물답게 행동하고, 그 인물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대전략 게임에 관심이 있거나, 중세 시대에 관심이 있거나, 롤플레잉 게임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해볼 만한 게임이다. 진입장벽은 있지만, 넘고 나면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다.